완도의 고요한 내면을 따라 걷는 여정
남파랑길 88코스는 전라남도 완도군 화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상왕봉, 완도수목원, 완도대교를 거쳐 군외면 원동리까지 이어지는 약 12.2km의 구간이다. 일반적인 해안길 트레킹과는 차별화되는 이 코스는, 남해안의 풍광을 숲속에서 조망하고 완도의 생태와 역사까지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복합적인 산행형 길로 분류된다. 도보여행자에게 있어 ‘조금 더 힘들지만 확실한 감동’을 선사하는 노선이다.
출발지인 화흥초등학교 인근은 평탄한 시가지 길로 시작되지만, 곧바로 숲의 울창함이 펼쳐진다. 코스 초입부부터 상왕봉을 향한 등산길이 시작되며, 여기서부터는 일반적인 걷기 코스가 아닌, 본격적인 숲길 트레킹이 된다. 상왕봉은 해발 약 644m로 완도의 최고봉 중 하나로, 오르는 내내 마주치는 짙은 숲의 향기와 조용한 산새 소리가 걷는 이의 숨을 정돈시킨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시야에 펼쳐지는 다도해의 풍경은 그간의 고된 걸음을 잊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다. 마치 여러 섬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은 남해안에서도 보기 드문 장면이며, 맑은 날에는 제주도와 해남까지도 조망할 수 있어 자연이 만들어낸 극적인 순간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 코스는 단순히 목적지를 향한 길이 아니다. 상왕봉과 완도수목원 사이를 잇는 숲길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여정이다. 울창한 난대림이 자생하는 완도는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기후 환경을 지녔기에, 이곳의 숲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산림과는 결이 다르다.
난대림의 숨결과 역사 속 장면을 따라 걷다
88코스 중간에 위치한 완도수목원은 국내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상록활엽수 집단 자생지가 존재한다. 이곳은 단순한 식물 전시관이 아닌, 생태 보존과 교육, 치유를 겸하는 종합 자연 체험 공간으로,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풍경을 제공한다. 봄에는 진달래와 산벚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엔 짙은 녹음이 온몸을 감싸며, 가을에는 단풍과 열매가 숲을 물들인다.
또한 이 코스에서는 역사드라마 ‘해신’의 촬영지로 유명한 해신 드라마 세트장도 만날 수 있다. 오랜 시간 바닷길을 통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장보고 대사의 삶을 그린 이 드라마는, 완도 지역의 해양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 콘텐츠이다. 비록 현재는 촬영 종료 후 세트장 대부분이 보존되지 않고 있으나, 그 자리에 남은 터와 조형물, 배경이 여전히 당시의 분위기를 담고 있어 역사와 이야기를 함께 상상하며 걸을 수 있는 흥미로운 구간이 된다.
상왕봉에서 내려오는 구간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완도대교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코스의 후반부에 접어든다. 이 구간은 비교적 인프라가 부족하고, 편의점이나 음식점이 전무하기 때문에 사전 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배낭형 수통, 에너지 바, 망원경 또는 쌍안경을 챙겨간다면 풍경을 더욱 깊게 즐길 수 있다.
안전한 산행과 의미 있는 여행을 위한 조언
남파랑길 88코스는 남파랑길 전체 여정 중에서도 체력 소모가 가장 많은 고난이도 구간에 속한다. 따라서 이 코스를 계획하는 경우, 기본적인 등산 체력과 트레킹 장비의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상왕봉 구간은 산악 지형으로 험한 구간이 있어 등산화, 등산 스틱, 충분한 수분 보충이 가능한 물통은 필수다.
교통편 또한 단순하지 않다. 출발지인 화흥초등학교까지는 완도버스터미널에서 ‘완도-남창’ 버스를 타고 부흥리에서 하차해야 하며, 종점인 원동버스터미널에서도 운행 횟수가 적기 때문에 시간대를 반드시 사전 확인해야 한다. 하산 시점에서 교통 수단을 놓치게 되면 숙박이나 장거리 도보를 고민해야 하므로 하산 시간과 일몰 시간도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
또한 코스 중간에는 공식적인 화장실이나 급수대가 없으므로, 출발 전 숙소나 인근 편의시설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야생 동식물이 많은 만큼, 벌레 퇴치제나 모기 기피제도 챙기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처럼 까다로운 코스를 굳이 걷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이 적고 조용한 깊은 숲, 남해 바다의 전경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감동의 풍경, 자연이 들려주는 생명의 언어가 이 여정에는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벗어나 진짜 자연과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남파랑길 88코스는 자연이 허락한 정직한 길이자, 깊은 힐링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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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봉에서 완도수목원까지, 숲과 바다의 깊이를 걷는 남파랑길 88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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